안녕하세요, 대학생 시절 기억을 주섬주섬 꺼내들고 온 장준영입니다.
얼마 전 매거진 팀에서 이벤트를 하나 진행했습니다. 일명 '향수를 담은 향수'입니다. 디지털과 관련된 독자님들의 향수(鄕愁)를 알려주시면, 직접 만든 향수(香水)를 선물로 드리는 이벤트입니다.
지난주에 모집이 마감됐습니다. 듣기로는 '장문의 편지'도 많이 들어왔다던데요. 모두 감사합니다. 최종 선정된 사연은 12월호 지면 매거진과 온라인 콘텐츠로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아무튼, 오늘 이야기하려는 건 디지털과 관련된 제 향수입니다. 사실 저는 향수라는 단어와 거리가 좀 있습니다. 순전히 기억력이 나빠서 그렇습니다. 좋았던 추억도, 나빴던 추억도 그냥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이벤트 담당하는 마케터님이 "디지털과 관련된 향수 뭐 없느냐" 물었을 때도 딱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없다"고 답했는데요. 그러다 며칠 전 적당한 기억 하나가 툭 튀어나왔습니다.
대학생 때였습니다. 지질학을 배웠는데요. 과장 좀 보태 강의실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야장과 펜, 10만원짜리 지질망치를 배낭에 쑤셔넣고서 필드 조사를 다녔습니다. 장소는 도로 건설 중인 공사장이나 야산처럼 암석이 지면 위로 훤히 드러난 곳이 좋습니다. 거기서 사진 찍고, 기록하고, 스케치한 뒤, 망치로 암석을 부숴 샘플을 채취해 배낭에 넣기를 반복합니다. 이 작업을 꼼꼼히, 촘촘히 할수록 해당 지역이 과거 어떤 지질 환경이었는지 더 잘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짐작하실 수 있듯 필드 조사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업무입니다. 사진 촬영 정도를 빼면 공책과 펜, 확대경, 망치 같은 도구만 사용합니다. 디지털의 '디'자도 없는 것들이죠. 당시엔 지질학이 원래 다 그런 건줄 알았습니다. 한 교수님이 필드 조사에서 '디지털 전환'을 시도하기 전까진 말이죠.
그 교수님은 얼리어답터였습니다. 옷도 항상 인디아나 존스처럼 입는 분이셨는데요. 어느 날 암석의 주향경사를 자동으로 측정하는 모바일 앱을 소개해줬습니다. 주향경사는 지층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기울었는지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본래 클리노컴퍼스라고 해서 나침반 비슷하게 생긴 정밀한 도구로 측정하는데요. 눈금 읽기가 많이 까다롭습니다. 그런데 이 앱을 쓰면 스마트폰을 암석에 가져다대는 것만으로 주향경사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습니다. 기기에 내장된 각종 센서가 기울기와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죠.
게다가 이 앱은 야장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조사 시간과 위치 좌표, 사진, 간단한 메모까지 암석 별로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필드 조사계의 디지털 전환 솔루션이 따로 없었죠. 덕분에 야외 조사 시간이 꽤나 단축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좋은 추억일 테지만요. 그렇지 않습니다. 터무니없는 일을 겪게 됐거든요. 어느 날 평소처럼 앱을 켰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지난 몇 주 간의 필드 조사 데이터가 전부 사라졌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피해자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내린 결론은 '스마트폰 최적화'. 불필요한 파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앱에 저장돼 있던 데이터가 모조리 삭제되고 만 것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입니다. 간단한 가계부 앱조차 서버에 사용자 정보를 저장하는 시대니까요. 앱을 삭제하거나 스마트폰을 최적화한다고 해서 데이터가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필드 조사 앱은 별도의 서버 없이 기기 내부 저장공간만 사용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대체 그때와 지금 뭐가 다르길래요. 관련해 조사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지금은 서버와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낮아진 시대입니다. 구글의 파이어베이스(Firebase)같은 종합 앱 개발 플랫폼을 이용하면 누구나 일정 용량까지는 무료로 서버를 앱에 붙일 수 있다고 합니다. 취미로 만든 앱이라도요.
예전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앱에 서버를 결합하려면 상당한 개발 지식과 운영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비즈니스 목적이 아닌 개인·학생용 앱의 대부분은 로컬 저장공간(개인 스마트폰)을 활용했고요. 수많은 대학생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필드 조사 앱도 바로 이런 경우였습니다.
결국 저희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조사했던 장소를 일일이 재방문해야 했습니다. 그 앱이요? 다시는 쓰지 않았다고 말하기에는 주향경사 측정 기능이 너무 유용해 지우지는 않았지만요. 모든 내용은 종이 야장에 다시 기록했습니다. 인디아나 존스 교수님도 이런 주의사항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던 걸 보면 아마 훗날 모든 데이터가 삭제되는 불상사를 겪게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야심차게 시작했던 디지털 전환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데이터 사고로 디지털 전환에 실패했다니. 뉴스에서 많이 들어본 표현이네요. 그 원인이 기술력 이슈와 사용자 부주의라는 점까지도요. 지금 후배님들은 서버 달린 야장 앱으로 필드 조사의 디지털 전환을 이뤘길 바랍니다. 기술 발전이 이래서 좋은 거예요.
아무튼 이게 디지털과 관련된 제 향수입니다. 이벤트 취지에 맞게 썼나 모르겠네요. 비록 이벤트는 끝났지만 독자님들도 이번 기회에 디지털에 대한 옛 기억을 들춰보시는 건 어떨까요.
다음은 현실의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추위 조심하시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