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연휴에 가족들과 요즘 핫한 영화인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왔는데요. 연신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무표정하게 팝콘을 드시는 아버지 사이에서 묘한 감상을 마치고 왔습니다.
몇 년 전 우연히 영화의 배경이 된 단종의 유배지, 영월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청령포까지 들린 것은 아니고, 단종의 묘만 둘러봤습니다. 그때 유해진 배우가 연기한 엄흥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알게 됐습니다.
영월의 호장에 불과한 엄흥도가 지금까지 단종과 함께 기억되는 것은 죽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지낸 이가 엄흥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록에는 세조가 "노산군(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이는 3족을 멸할 것"이라며 엄중히 경고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엄흥도는 "이로운 일을 하다 화를 입는 것은 두렵지 않다"며 기꺼이 선산에 몰래 단종의 시신을 모셨다고 하죠. 그 후 오랜 기간 엄흥도와 그의 자손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엄흥도의 이야기는 2024년 개봉한 킬리언 머피 주연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수녀원의 비리를 목격한 입장인데, 나섰다가는 자칫 가족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처지였거든요.
두 영화가 공통적으로 다루는 건 도덕적인 딜레마입니다.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일을 목도했을 때, 나에게 해가 미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올바르다고 믿는 행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안위를 위해 모른 척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저는 나서는 사람이 위대하듯 모른 척 하는 사람도 마냥 비난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생각을 하는데요. 생존과 안전에 대한 본능에 충실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떳떳함'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나의 행동을 두고 떳떳하게 잠에 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엄흥도는 훗날 단종의 명예가 회복되며 벼슬을 받고, 오늘날까지 충절함의 예로 언급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그날 그 선택으로 인해 엄흥도가 잠을 설칠 후회는 하지 않았을 거라는 짐작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도덕적 결심이 안위를 위협하는 일은 드물죠. 현실에서는 도움을 건넬까 말까, 몸이 선뜻 움직이지 않는 망설임의 순간이 많습니다. 제가 그렇거든요. 종종 그때 내밀지 못한 도움에 후회하고는 합니다. 그러니 후회하지 않기 위해, 오늘 내일, 우리 모두 작은 떳떳함을 실천해봐도 좋겠습니다. 엄흥도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