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부산 출장 다녀온 뒤 더 까맣게 탄 장준영입니다.
부산 출장의 주된 업무는 행사 참관이었지만요. 틈을 내 다른 취재도 했습니다. 해운대 일대 옥외광고 자유표시구역의 현황 조사입니다.
옥외광고 자유표시구역은 옥외광고 규제를 대폭 완화한 지역을 말합니다. 건물 외벽에 설치된 옥외광고는 원래 도시 미관과 안전 등의 이유로 광고물의 크기와 모양, 설치 방법이 엄격히 관리되고 있는데요. 정부가 일부 지역에 한해 이걸 풀어준 것이죠.
이유는 그 지역을 '명소화'하기 위함입니다. 규제가 사라지면 전에 없던 초대형, 초고화질의 실험적인 옥외광고가 등장할 테고, 이를 보러 많은 사람이 모이면서 자연스레 명소가 탄생할 것이란 구상입니다.
마냥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고요. 미국 뉴욕의 타임스스퀘어와 영국 런던의 피카딜리서커스, 일본 오사카의 도톤보리 등이 참고 사례입니다. 이곳을 가보신 적이 없다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나오는, 휘황찬란한 광고가 가득한 도시 풍경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아무튼 2016년 12월에 서울 코엑스 일대가 제1기 자유표시구역으로 지정됐고요. 2023년 12월에는 서울 명동관광특구와 부산 해운대해변, 서울 광화문광장이 제2기 자유표시구역으로 추가 지정됐습니다.
특히 해운대 일대는 지난 6월부터 본격 운영에 돌입했는데요. 이번 부산 출장에서 보고 싶었던 건 바로 이 해운대 자유표시구역의 상황이었습니다.
해운대 자유표시구역을 대표하는 미디어는 단연 그랜드 조선 외벽에 설치된 초대형 전광판입니다. 평소에는 상업 및 공익 광고가 송출되다가 매시 15분, 45분이 되면
실제 구조대원을 모델로 한 라이프 가드 영상(관련 기사)이 나와 실시간 기상 상황을 안내해주는데요. 31미터짜리 구조대원이 등장할 때마다 스마트폰 셔터를 누르는 시민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광고를 보다가 한 가지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전광판이 호텔 외벽에 설치돼 있다는 건, 바꿔 말해 상당수의 오션뷰 객실이 일반 객실로 전환됐다는 뜻입니다. 언뜻 봐도 수십 개에 달하는 오션뷰가 전광판에 '희생'됐고요. 이는 전반적인 객실 단가 감소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랜드 조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미디어 설치를 승낙했을까요?
그 해답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산국제마케팅광고제의 한 세션에서 이 미디어 기획 담당자를 직접 만날 수 있었거든요.
각각 신세계프라퍼티와 이노션에서 옥외광고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두 명의 담당자에 따르면, 그랜드 조선 미디어는 양사의 합작품입니다. 그리고 짐작한 것처럼 옥외 미디어 설치 과정에서 까다로운 설득의 과정을 거쳤다고 하는데요.
신세계프라퍼티측 담당자는 조선호텔앤리조트 임원과의 미팅 자리에서 '브랜딩'과 '수익성' 두 가지 카드를 꺼내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저희는 고객 행복에 진심인 기업입니다. 그랜드 조선 임원분들께도 '초대형 옥외 미디어가 고객 즐거움이라는 호텔의 비전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어요. 나아가 호텔이 입소문을 타게 되면 오션뷰 감소로 인한 매출 하락을 상회할 만큼의 브랜딩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도 했죠."
-신세계프라퍼티 옥외광고 사업 담당 A씨
아주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닙니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말부터 명동 자유표시구역에서 옥외 미디어를 운영 중인데요. 회사에 따르면, 광고물 운영 2개월 만에 100만여 명 이상이 백화점을 방문했고,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20% 증가했습니다. 이런 성과가 그랜드 조선 의사결정권자를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이죠.
미디어 설치에 맞춰 그랜드 조선도 기민하게 움직였습니다. 전광판 아래 야외 테라스 공간을 리뉴얼, 손님 끌어모으기에 나섰거든요. 실제 리뉴얼 이후 한달 간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배 증가할 만큼 비즈니스적으로도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그랜드 조선은 초대형 옥외 미디어가 가져올 장기적인 브랜딩 효과에 주목, 단가 높은 오션뷰 객실을 포기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미 '손해는 보고 있지 않다'는 후문이고요.
그렇다면 광고 회사인 이노션이 얻게 되는 건 무엇일까요? 바로 '디지털 옥외광고 선도 기업'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이노션 담당자는 옥외광고에 대한 회사의 비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냥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체류'를 유발하는 옥외광고가 필요합니다. 이게 바로 명소화를 이끄는 핵심 요소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도심의 텍스트와 맥락을 읽어내 콘텐츠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날씨나 유동인구 특성 같은 TPO(시간, 장소, 상황)를 고려해 맞춤 콘텐츠를 송출하는 것이죠."
-이노션 옥외광고 담당자 B씨
자, 여기까지 읽은 독자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해운대 일대가 진짜 옥외광고 명소가 될 것 같다고 느끼시나요?
사실 아직 '명소' 운운하기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그랜드 조선 말고는 이렇다 할 초대형 옥외 미디어가 드물거니와, 그마저도 일반 상업 광고만 송출되고 있어 체류를 통한 명소화 전략을 실천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거든요.
실제 부산옥외광고협회 관계자는 "해운대 자유표시구역이 활성화됐다고 말하기엔 이르다"며 "규제가 완화됐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은 데다 미디어 설치 비용이나 노후화된 건물, 업계 관계자 간의 이해 상충 등 시장 성숙을 가로막는 요인이 많은 상황"이라고 전했습니다.
옥외광고가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많은 기업이 주목하고 있는데요. 기존 산업과 새로운 산업이 마주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잡음이 생기는 모양새입니다. 저도 기회가 될 때마다 관심있게 살펴보고, 꾸준히 소식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