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여러분들의 국민학교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의젓한 중학생입니다. 따라서 목욕요금도 일반요금 800원을 내야합니다.
어떤 어린이는 집에서 부모님으로부터 800원을 받아가지고 와서는 국민학생이라고 속여 400원은 군것질하는데, 이것은 아주 나쁜일입니다. 우리 대한의 어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올바르고 참되게 자라야 합니다.
1979년 2월
사단법인 한국목욕업중앙회 종로구 지부
어떠신가요? 당시 저는 속으로 감탄했습니다. 무척 잘 쓴 글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글은 한국목욕업중앙회에서 1979년 작성한 안내문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한 어린이에게 어른 요금을 받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에도 나이를 속여 부모님 용돈을 슬쩍하는 중학생들이 많았던 모양인데요. 50~60대인 독자님들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당시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는 흥미로운 역사적 기록물이기도 하지만요. 특별히 제 마음에 든 부분은 1) 공문서로서 정보 전달이라는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2) 화자와 청자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글에 주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진 않지만요. 화자와 청자의 존재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목욕 요금을 반만 내는 말썽쟁이 중학생들과 이를 따끔하게 훈계하려는 목욕탕 주인 말이죠.
보통 이런 글에는 화자나 청자의 존재가 감춰져 있기 마련입니다. 괜히 어설프게 등장했다가 글이 늘어져 정보 전달마저 실패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럼에도 '제대로만' 드러난다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독자의 주의를 끌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첫 문장을 보세요. 어린이들의 졸업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불과 두 문장 뒤에서 태도를 바꿔 훈계할 마음 가득이지만, 독자가 글을 안 읽으면 소용이 없으니 일단 듣기 좋은 말을 하며 눈길을 사로잡는 모습입니다. '의젓한' 같은 단어에도 마찬가지 의도가 담겨 있겠죠.
이후 본론으로 돌입합니다. 읽는 사람이 '뜨끔'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례-부모님을 속여 군것질을 한다-를 서술한 뒤, 왜 거짓말을 하면 안되는지 분명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글을 읽게 만들고, 내 이야기처럼 느끼게 한 뒤, 행동을 촉구하는 짧지만 단단한 구조고요. 문장도 군더더기가 없네요. 현란하진 않아도 참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문서 속 인간적인 요소는 주위 환기 그 이상의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반 년 전 우연히 들른 한 아파트 단지에서 본 공고문 사례입니다. 오물관 공사를 했는데 예상보다 규모가 커져 관리비를 인상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관리사무소가 이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한번 보시죠.
"처음에는 단순히 오물관만 보수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굴착을 해보니 간단한 공사가 아니었고..."
"현재까지 모아두었던 관리비 얼마는 오수관로 공사비로 전부 지출되어 관리비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건물 공사비의 부족한 금액 얼마를 세대로 나누어 얼마씩 각출하고자 합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아파트가 노후되어 곳곳에 보수할 곳만 늘어나고 있는데 따로 수선충당금을 청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의 관리비로는 아파트를 꾸려가기 힘든 상황입니다. 하여, 다급한 심정으로 불가피하게 관리비를 인상하고자 하오니 각 세대 주민들께서는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파트 게시판 공고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솔직하고 인간적인 글입니다. 관리비 인상에 대한 입주민의 반발을 고려해 이렇게 쓴 것일 텐데요. 만약 제가 이 아파트 주민이라면, 요금 인상은 쓰라려도 관리사무소의 결정을 충분히 납득하고 군말없이 받아들였을 것 같습니다.
만약 충분한 설명없이 통보식으로 인상 소식을 전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누군가는 관리사무소로 찾아와 따졌을지도 모르고요. 이를 해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됐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해당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이 같은 글쓰기를 통해 불필요한 언쟁을 상당부분 방지했을 테니, 이 글을 쓴 사람은 참 유능한 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제가 글쓰기 고수도 아니고, "글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낯부끄럽긴 하지만요. 아무래도 글쓰기가 업이다 보니 마음에 드는 글을 발견하면 메모해뒀다가 콘텐츠에 적용하려 노력하곤 하는데, 그 과정을 한 번쯤은 독자님들께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저희 팀도 내부적으로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고민 중으로, 조만간 새로운 시도의 결과를 보여드릴지도 모르겠네요.
독자님들께선 어떤 글을 선호하시나요? 혹은 글을 더 잘 쓰기 위한 나만의 노력은 무엇인가요? 보고 듣고 배우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